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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미래유산 역사탐방] 일제에 유린당한 한서린 남산 기슭… 애국지사 동상 ‘혼’ 달래는 호국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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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장충단비~장충체육관 ‘호국로’

서울미래유산은 정치역사, 산업노동, 시민생활, 도시관리, 문화예술 등 5개 분과로 나뉜다. 정치역사분과 세부 선정 기준에 따르면 당시 흔적이 모두 사라지고 터만 남아 있는 경우 미래유산 선정보다는 표지석, 지도 표시 정도로 기념한다. 동상, 탑, 기념물의 경우 인물에 대한 평가보다는 예술적 가치만을 고려한다. 분묘의 경우 가옥에 비해 보존 중요도가 낮고 인물 평가에 따른 논쟁을 우려해 미래유산 선정에서 제외한다. 다음번엔 산업노동분과 세부 선정 기준을 알아본다. 서울시는 미래유산을 시민들과 공유하기 위해 ‘서울미래유산 역사탐방‘을 서울신문·문화지평과 공동 주관으로 매주 토요일 진행한다. 서울미래유산 역사탐방 홈페이지(futureheritage.seoul.co.kr)에서 답사 코스 확인과 참가 신청을 할 수 있다. 다음 답사는 경희궁에서 모여 돈의문터, 경교장, 충정아파트, 아현동 가구거리, 성우이용원 등을 돌아본다.

장충단비 앞면 글씨는 당시 황태자였던 순종 황제가 썼다. 뒷면에는 충정공 민영환이 비석의 내력에 대해 썼다.

“제가 문화재청 문화지킴이 활동도 하고 순찰을 하면서 이 지역 문화재도 수시로 관리하고 있습니다.”

서울미래유산 탐방답사 8회차 모이는 장소가 지하철 3호선 동국대입구역 6번 출구 장충파출소 앞이었다. 플래카드를 걸고 있자니 한 경찰관이 다가와 말을 건넨다. 플래카드 거는 위치가 잘못돼서 지적하러 나온 줄 알았더니 괜찮으니 계속하란다. 경찰관은 자신을 서울 중부경찰서 소속 위시환 경위라고 소개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문화재 사랑은 물론 김성섭 중부경찰서장의 ‘우리 동네 바로 알기’ 시책까지 알려 준다. 거기다가 중부경찰서가 펴낸 ‘서중경(서울 중부경찰서)의 역사산책’이란 책자까지 한 권 건넨다. 책자는 지역 문화재와 동네마다 감춰진 이야깃거리를 140쪽 분량으로 소개한다. 김성섭 서장은 발간사에서 “동네 역사를 알아야 지역 실정에 맞는 맞춤형 치안 시책을 펼 수 있다고 생각해 책을 썼다”고 밝혔다. 치안에 인문학을 결합시킨 이런 발상이야말로 요즈음 말하는 융합인 셈이다.

1회차 정동 답사를 이끈 이필용(47) 서울미래유산해설사가 두 달 만에 기가폰을 목에 걸었다.

일제가 뽑아 버렸던 ‘장충단비’
을미사변·갑신정변 때 희생된 영령 기려

이 해설사는 서울시사회적경제지원센터 마을기업팀 매니저로 일하면서 짬을 내 한양도성 길라잡이 활동 등을 하는 베테랑 문화해설사다. 이 해설사가 일행을 처음 멈춰 세운 곳은 1900년(광무 4년)에 세워진 장충단비(서울시유형문화재 제1호) 앞이다. 장충파출소에서 불과 30여m 떨어진 곳에 있다. 이 비는 명성황후 시해 사건인 을미사변을 비롯해 갑신정변, 임오군란 때 희생된 영령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을미사변 때인 1895년(고종 32년)에는 궁내부 대신 이경직과 시위대장 홍계훈 등 많은 병사들이 일본군에 의해 희생됐다. 고종은 이곳에 사전(祠殿) 1동과 부속건물 2채를 세워 장충단을 꾸몄다. 대한제국시절 봄, 가을 두 차례 지내던 제사를 일본의 통감부가 설치된 뒤 1908년 중단됐다. 1910년에는 장충단을 폐사하고 비석도 뽑아 버렸다. 항일 감정을 자극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조선총독부는 1919년부터 벚꽃을 잔뜩 심고 1920년대 후반에는 장충단공원을 조성했다. 뽑힌 장충단비는 1945년 해방과 함께 현 신라호텔 자리에 세워졌고 1969년 지금 자리로 옮겨졌다. 건물은 한국전쟁 때 소실됐다.

신라호텔 자리에는 일본의 조선총독부가 1909년 안중근 의사에게 저격된 이토 히로부미를 추모하기 위해 1932년 그의 이름을 딴 사찰 박문사를 들여놓았다. 이 해설사는 “일제가 박문사를 지으면서 경복궁 석재와 목재를 뜯어 왔고 경희궁 정문 흥화문을 가져와 정문으로 사용했다”면서 “심지어 상하이 사변 때 죽은 일본군 육탄 3용사 동상을 세워 대륙침략 정신교육 전진 기지로 삼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육탄 3용사는 아사히신문이 2007년 6월 13일 당시 보도가 엉터리였다고 오보를 인정한 바 있다.

이 해설사는 “박문사를 지은 일본 다이세이(大成) 건설이 후일 신라호텔까지 지었다”며 “이 역사적 연결성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날 답사를 모두 마치고 수표교 위에서 단체 사진을 찍었다.

천덕꾸러기가 돼 버린 ‘수표교’
청계천 공사로 옮긴 뒤 돌아가지 못 해

장충단에 박문사를 짓듯 일제는 원구단을 허물고 철도호텔(현 웨스턴조선호텔)을 짓고 창경궁을 동물원인 창경원으로, 경희궁(경덕궁) 자리에 경성중학교를 세우는 식으로 우리 문화재를 짓밟았다.

수표교 교각에 새겨진 경진지평(庚辰地平) 각태자. 1760년에 새겨 넣고 네 단계로 수위를 관리했다. 수표교는 본래 청계천에 있던 것을 복개공사 때문에 1965년 현 자리로 옮겼다.

장충단비 지근 거리에 수표교(서울시유형문화재 제18호)가 보인다. 이 해설사는 일행을 다리 아래로 안내했다. 대부분 다리 밑을 처음 구경한다고 웅성거렸다. 다리 상판을 이고 있는 교각에는 경진지평(庚辰地平) 각자(刻字)가 있다. 1760년에 글자를 새겨 넣고 네 단계로 수위를 관리했다. 수표교는 원래 청계천에 있었는데 복개공사 때문에 1958년 옮겨졌다가 1965년 현 자리에 놓여졌다. 엉뚱한 곳에서 천덕꾸러기처럼 서 있는 수표교가 언제쯤 청계천으로 되돌아갈지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장충단에는 유난히 동상이 많다. 이준 열사, 유관순 열사, 외솔 최현배 선생 등 모두 일제에 항거한 이들이다. 중구는 장충단비~한국유림 독립운동 파리장서비~수표교~이준 열사 동상~이한응 선생비~최현배 선생 기념비~유관순 열사 동상~3·1독립운동 기념탑~국립극장~김용환 지사 동상~자유센터로 이어지는 길을 ‘호국의 길’로 이름 지었다. 일제에 의해 철저히 유린당한 남산 기슭에 이들을 모셔 혼이라도 달래려 한 게 아닐까 추측한다.

석호정 활터에서 국궁을 하는 시민들. 활터는 조선 인조 때인 1630년쯤 만들어졌다. 원래 위치는 지금 자리보다 더 밑자락인 외솔 최현배 선생 기념비 근처였는데 그곳에는 표지석만 남아 있다. 왼쪽에 보이는 것은 국립극장 뒤편 모습이다.

조선 인조 때 만들어진 ‘국궁도장’
활 쏘며 심신 수련하는 생활체육인 모여

남산 자락을 오르기 시작하다 보니 석호정 활터 표지석이 나타났다. 조선 인조 때인 1630년쯤에 만들어진 국궁도장이다. 1970년 서울시와 서울정도600년고증위원회의 배려로 표지석 자리보다 위로 올라가 남산순환도로 옆에 자리잡았다. 이날도 활을 쏘며 심신을 수련하는 생활체육인들이 여럿 나와서 국궁을 즐기고 있었다. 사대(射臺) 앞에는 습사무언(習射無言)이란 글이 보인다. 활을 쏠 때 말하지 말라는 궁도구계훈 중 하나다. 가로글씨지만 우에서 좌로 읽어야 한다. 표적까지는 145m, 쏘아 올린 살이 멀어지며 순식간에 육안에서 사라진다.

답사단은 남산순환로를 통해 서울 미래유산인 국립극장을 들른 뒤 자유센터, 반얀트리 서울 호텔을 지나 한양도성길을 제법 걸었다. 반얀트리는 과거 타워호텔이란 이름을 가진 자유센터 부속 숙박동이었다. 자유센터는 1962년에 열린 아시아반공연맹 임시총회의 회의장이었고 타워호텔이 숙박시설이었던 것이다.

이날 답사에 참여한 김수경(48) 소요재 대표는 “22살 때 타워호텔에서 호텔리어가 되기 위해 인턴십을 했던 추억이 있다”며 “불의의 교통사고로 꿈을 접고 고향인 부산으로 귀향해 직조를 배웠다”고 말했다. 그는 현재 직물공예와 자투리 천을 이용한 업사이클링 예술공예를 전문으로 하는 공방을 창신동에 두고 있다.

이날 답사에 참석한 김수경 소요재 대표는 “어린이가 참된 미래유산”이라고 했다. 마침 이날 어린이가 세 명이나 부모 손을 잡고 나왔다. 서울미래유산인 장충리틀야구장 앞에서 어린이들이 미래유산 플래카드를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국립극장 내려오면 미래유산 ‘군락’
테니스장·야구장·체육관·족발골목 등

이 해설사는 “이 두 건물 모두 근대 건축계 거장 김수근씨가 설계한 것”이라며 “김수근씨는 파괴된 한양도성에서 나온 성석을 기초석이나 옹벽으로 사용하는 저급한 역사 인식을 보여 줬다”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이 해설사는 서울KYC의 한양도성 목멱구간 해설사로도 활동하고 있기 때문에 이 지역 도성 파괴를 늘 안타까워했다.

호국의 넋이 충만한 남산 기슭을 둘러보고 다시 원점으로 내려오는 장충단로에서 장충테니스장, 장충리틀야구장, 길 건너 장충체육관과 장충동 족발골목 등 서울미래유산 ‘군락’을 만났다.

장충단 옆에 있는 장충단파출소 위시환(왼쪽) 경위는 지역 치안과 문화재 보호 활동을 겸하고 있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위 경위가 건네준 서울 중부경찰서가 펴낸 ‘서중경의 역사산책’을 받아 든 유성호(가운데) 문화지평 대표, 이날 보조 진행을 맡은 손안나 서울미래유산해설사.

인근에 있는 남산 1호 터널도 서울미래유산이다. 서울 요새화 계획에 따라 교통 기능보다는 방공호 목적으로 건립됐다. 이 터널로 인해 강남 개발이 가속화되는 등 건축사와 정치사적인 측면에서 보존 가치가 있다. 장충테니스장은 장호테니스장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1971년 지어진 우리나라 테니스 역사의 요람이다. 장충체육관은 우리 건축설계와 기술로 지어진 최초의 돔형 체육관이다.

남매와 함께 온 김연진 경기관광공사 과장은 “이런 프로그램이 서울에서만 이뤄지는데 도보길 역사탐방을 경기도에 접목해 보고 싶다는 생각에서 나오게 됐다”고 말했다. 김수경 대표는 “이 프로그램은 ‘참된 미래유산’인 우리 아이들에게 선물로 전해 줄 보물지도를 그리는 일”이라며 “단순한 추억 찾기가 아니라 우리가 알고 지켜야 할 가치들을 들려주고 함께 보물지도를 그릴 때 서울미래유산 가치가 더 커질 것”이라고 말했다.

예전부터 이 지역 답사를 마치면 늘 태극당 제과점 쪽 먹자골목에 있는 ‘닭한마리 돼지한근’이란 곳을 들른다. 이날도 답사단 여럿이 푸짐한 김치찌개로 허기를 채웠다. 아쉽게도 70년 전통의 태극당은 아직 서울미래유산이 아니다.

글 사진 유성호 ‘문화지평’ 대표
2016-09-28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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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제공 : 정책브리핑 korea.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