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르비아 교환학생 박진혁씨 ‘탈출기’
“인천공항에 발을 딛는 순간 ‘혹시 감염됐더라도 이제 치료는 받을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에 긴장이 풀리면서 나도 모르게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어요.”동유럽 세르비아 베오그라드대학에 교환학생으로 재학 중이던 박진혁(24·가명)씨는 지난 22일 코로나19로 국경이 폐쇄된 상황에서 천신만고 끝에 한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동유럽 탈출기를 서울신문에 소개했다. 박씨는 세르비아 현지 공항이 전격 폐쇄된 가운데 프랑스 항공사가 세르비아 거주 자국민 귀국을 돕기 위해 띄운 임시편 항공기를 타고 파리를 거쳐 극적으로 귀국에 성공했다.
지난달 16일(현지시간) 세르비아에 도착했을 때만 하더라도 아무런 조짐이 없었다. 이탈리아와 스페인 등에서 코로나19가 확산 중이었지만 베오그라드 시내는 평온했다. 그러다가 지난 6일 세르비아 내 첫 확진환자가 발생했고 12일에는 갑자기 휴강할 수 있다는 공지가 나왔다.
외국인 입국 금지와 항공기 운항 축소 등으로 22일(현지시간) 텅 빈 파리 드골공항 내부 모습. 면세점은 모두 문을 닫았고 이날 E2 터미널 항공편은 인천행 항공기 1대가 전부였다. |
환자가 늘어나면서 분위기는 싸늘해졌다. 지난 15일부터 베오그라드 시내 병원에 군인들이 배치되는 등 사정이 급박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당시 모든 학교 6월까지 휴교, 야간 통행금지, 외국인 입국 금지, 카페 및 음식점 운영 시간 단축 등 조치가 내려졌다. 동양인을 보면 “코로나, 코로나”라고 화내며 고개를 돌리는 현지인들 때문에 불안에 떨기도 했다.
감염이라도 되면 외국인은 치료를 받을 수 없다는 소문까지 돌면서 불안감은 극대화됐다. 망연자실하고 있던 중 현지 대사관에서 21일 프랑스행 임시 항공편 운항 소식을 알려 왔다. 베오그라드~파리~인천공항까지 환승 연결 티켓 예매가 불가능했고 프랑스는 한국인 입국도 금지된 상태였지만 무작정 티켓을 끊었다.
세르비아를 떠나는 날 공항 발권데스크에서 ‘프랑스 입국 의사가 없다’고 밝히고 한국까지 환승으로 연결해 달라고 요청해 가까스로 환승 티켓을 발권받았다. 현지 대사관 직원이 공항까지 직접 나와 귀국길에 감염 우려가 있다며 마스크 한 장을 건네줄 때는 눈물이 핑 돌았다.
박씨는 지난 22일 오후 인천공항에 도착한 후 유럽 지역 입국자 특별검역 조치에 따라 인천의 한 호텔에서 1박을 하면서 코로나19 검사를 받았다. 다음날인 23일 음성 판정을 받아 현재 14일간 자가격리에 들어갔다.
박씨는 “유학생이 많은 이탈리아에는 전세기를 띄운다고 하는데 세르비아를 비롯한 인근 헝가리, 폴란드, 체코 등 동유럽 지역은 공항이 폐쇄돼 우리 교환학생이 남아 있다”며 “크로아티아 자그레브에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지진까지 발생해 항공편이 여의치 않아 관심이 절실하다”고 호소했다. 지난 21일 현재 세르비아는 확진환자가 188명(사망 2명)으로 늘어나는 등 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이 동유럽 지역까지 덮치기 시작했다.
한편 코로나19가 전 세계로 확산하면서 현지 유학생과 교민의 귀국이 이어지고 있다. 미국에서는 감염자가 5만명을 넘어서자 한인사회를 중심으로 ‘한국이 상대적으로 안전하다’는 인식이 커지고 있다.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의 인천~뉴욕, 인천~LA 노선 항공권 가격도 평소보다 3배 가까이 올랐지만 표를 구하기 쉽지 않은 상황이다.
중남미에서 발이 묶인 한국인들도 귀국길에 올랐다. 코로나19 확산을 막고자 입출국을 금지한 페루에서는 여행자와 봉사자 등 200여명이 26일 한국행 특별기를 이용하기 위해 수도 리마로 이동 중이다. 에콰도르와 온두라스에서도 한국인들이 제3국을 경유해 귀국했다. 유럽에서는 코로나19 피해가 심각한 이탈리아에서 교민 600여명이 전세기로 귀국한다.
제주 황경근 기자 kkhwang@seoul.co.kr
서울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2020-03-26 12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