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내부고발자 보호책
세조 2년(1456년) 공주 판관 송맹연이 분대어사(임금의 명으로 지방에 파견돼 민정을 살피던 관리)에게 탄핵돼 수령 자리에서 쫒겨났다. 이 소식을 접한 아전들이 밀고자를 찾아내려고 혈안이 됐다. 유력한 고발자는 관노 득만이었다. 그는 관아의 대소사를 두루 챙기는 일을 맡아 송맹연의 부정 행위를 샅샅이 알 수 있었다. 어사가 공주를 찾았을 때 몰래 그와 접촉했다는 정황도 포착됐다. 관리 이득신과 우성, 김비, 이정근이 그를 불러내 강하게 문초했다. 득만은 “나는 고발자가 아니다”라고 버텨 가까스로 풀려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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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 4년(1509년) 엄동설한에 한 황해도 사람이 신무문(경복궁 북문) 밖에서 억울함을 호소하며 격쟁(꽹과리나 북 등으로 주변을 시끄럽게 해 왕의 이목을 끄는 행위)을 했다. 그가 행대감찰(지역을 다니며 비위를 살피는 감사)에게 고을 수령의 비리를 고발했는데, 수령이 이 사실을 눈치채고 복수하려 한다는 내용이었다. 왕은 이 사안을 조사해 그가 보복받는 일이 없게 하라고 명했다.
역대 왕들은 진실한 언로를 확보하는 것이 민심을 얻는 데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여겨 ‘내부 고발자’를 보호하는 데 누구보다 앞장섰다.
성종 19년(1484년) 한 사헌부 간관이 왕에게 “대신 김석이 어머니 상(喪) 중에 기생을 끌어들였다”며 탄핵했다. 왕이 조사 경위를 묻자 그는 “어떤 관리에게서 전해 들었다”라고 답했다. 왕은 “누가 그런 말을 했느냐”고 재차 추궁했지만 간관은 더 이상은 밝힐 수 없다고 맞섰다. 결국 그는 옥에 갇혔다. 사헌부는 왕에게 “김석 건을 제보한 이는 관리 권건”이라고 밝힌 뒤 “이런 식으로 제보 출처가 밝혀지면 간관들은 ‘들을 곳’이 없어져 조정 내 언로도 막힌다. 앞으로 대간의 말 출처를 밝히는 것은 불가하다”는 공식 입장을 냈다. 머쓱해진 성종은 한 발 물러나 옥에 가둔 간관을 풀어줬다. 이런 진통 끝에 조정에는 간관이 왕에게 말의 출처를 밝히지 않는 전통이 생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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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형석 국민권익위원회 대변인 |
■출처:고려사 권85, 형법지2, 포도조(捕盜條), 세조 2년(1456년) 3월 8일, 성종 19년(1488년) 1월 14일, 중종 4년(1509년) 1월 15일
곽형석 명예기자(국민권익위원회 대변인)
2017-10-23 35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