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의 정체성은 약속을 지켜낼 수 있는 힘에서 온다.하루에도 수십번씩 약속을 어기는 사람을 신뢰할 수는 없지 않은가.약속을 기억할 수 있는 힘이 없다면 약속을 지켜낼 수가 없다.아무리 어려운 순간에도 자신이 한 약속을 잊지 않는 사람,우리는 그런 사람을 친구나 연인으로 두고 싶어한다.자주 말을 바꾸는 사람,자신이 한 약속을 기억해내지 못하는 사람은 한 마디로 ‘아웃’이다.
자신이 한 약속을 밥먹듯이 어기는 아름다운 여자가 있다.‘첫키스만 50번째’의 주인공 루시(드루 배리모어)가 그녀.그녀의 기억은 유통기한이 단 하루다.루시는 1년 전 교통사고 이후 사고 당일로 기억이 멈춰버린 단기 기억상실증 환자.그녀를 사랑하는 수의사 헨리(아담 샌들러)로서는 미칠 일이다.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았다고 장담해봐도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되고 만다.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아 그녀에게 키스를 한다고 해도 그녀의 입장에서 볼 때는 모든 키스가 첫 키스일 뿐이다.분명 당신과 결혼을 하겠다고 약속을 해놓고도 뒷날 아침이면 딴소리를 한다.당신 누구냐고 따지기까지 한다.난 당신의 애인이라고.이거,미칠 일이다.
기억은 한 존재의 뿌리다.가족은 같은 기억을 공유하는 작은 집단이다.기억이 없다면 가정도 없다.슬프거나 기쁜 추억을 공유함으로써 가족은 ‘내’ 존재의 바탕이 된다.기억은 한 국가의 정체성을 이루는 근본이기도 하다.하나의 집단은 과거의 역사를 기억하고 공유함으로써 비로소 ‘민족’이라는 의미 있는 공동체를 이루어 간다.하나의 민족이 공유하는 기억,우리는 그것을 ‘문화’라고 부르거나 ‘역사’라고 부른다.
나쁜 기억은 지워버리고 싶어한다.그러나 지워버리려고 해서 지워지는 것이 기억은 아니다.히틀러의 만행도 독일 역사의 지울 수 없는 한 부분이고,치욕스러운 한 사람의 기억도 그 사람의 정체성을 이루는 소중한 요소다.나쁜 기억마저 나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하나의 벽돌이다.약속을 하고,약속을 기억하고,약속을 이루어낼 수 있는 힘! 영화 ‘첫 키스만 50번째’는 우리에게 그런 힘을 기르라고 말해준다.
2004년작.피터 시걸 감독.아담 샌들러·드루 배리모어 주연.
서울 배문고 교사 desert44@hite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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