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금 내준 초등학생에 아직 고맙단 말 못해
“하늘만 쳐다봐도 서러웠지요. 파란 하늘 보면서… 왜 하필 우리 남편이… 뭐 그런 생각도 했고. 그래도 요즘은 많이 나아졌어요.”22일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강성애(61)씨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강씨는 2010년 11월 23일 북한의 연평도 포격 도발 때 사망한 김치백(당시 61세)씨의 아내다. 김씨는 포탄이 비 오듯 쏟아지던 그날 연평도 해병부대 관사 신축공사 일을 하다가 변을 당했다. 당시 포격으로 숨진 민간인은 김씨 외에 배복철(당시 60세)씨가 있었다.
| 전사자 추모하는 해병대 전역자들 북한의 연평도 포격 도발 2주년을 하루 앞둔 22일 서울역 광장에서 ‘연평도 포격도발 전사자 추모 및 영토수호 범국민 대회’가 열렸다. 2년 전 그때 현장에서 복무했던 해병대 전역자들이 거수경례를 하고 있다. 박지환기자 popocar@seoul.co.kr |
●“서러웠지만 이젠 좀 나아져”
몇 번을 들어도 믿기지 않았던 남편의 죽음. 강씨를 달래준 것은 시간이었다. 서울신문과 통화가 닿았을 때 강씨는 “김장거리를 사러 시장에 나와 있다.”고 했다.
“남편과 손 잡고 병원 가고 운동 다니는 내 또래 여자들을 보면 우리 그이 생각이 많이 나지요. 우리 남편은 손재주가 좋아서 수도가 막히거나 전기가 끊어지면 다 고쳐 줬지요. 애들이 암만 엄마한테 잘하려고 애써도 남편만 한 사람은 없는 것 같아요.”
척추협착증을 앓고 있는 강씨는 딸 내외와 함께 살고 있다. 외로움은 덜하지만 살림살이는 여유가 없다. 전사하거나 부상당한 군인들은 국가로부터 보상을 받았지만 숨진 김씨는 민간인 신분이었던 터라 그런 게 전혀 없었다. 인천시가 장례비를 지원한 게 고작이었다.
북한의 공격 때문에 사망한 것이니 “남편을 의사자로 인정해 달라.”고 국가에 요청해 봤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의사자 인정받지 못해”
“한때는 국가가 너무 야속하다는 생각도 했는데 지금은 다 지난 일이죠. 그래도 국민들이 모아 준 성금이 있어서 우리 가족은 슬픔을 이겨내고 다시 일어설 수 있었어요. 시민 모금액 중 초등학교 2학년생이 보내 준 2000원도 있었는데 정신이 없어 고맙다는 말도 못했네요.”
지난해 연평도 포격 1주년 때 김씨와 배씨가 숨진 현장 인근에는 ‘연평도 피격 민간인 사망자 추모비’가 건립됐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남편의 죽음이 사람들 뇌리에서 잊혀져 갈 것이란 걸 강씨는 잘 알고 있다. “연평도가 안정을 되찾아 다행이지만 졸지에 가장을 잃은 우리들은 여전히 눈물 속에서 살아갑니다.”
유대근기자 dynamic@seoul.co.kr
2012-11-23 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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