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멘트 조각이 떨어지는 계단을 오르자 복도에 나이지리아인 남녀 4명이 리듬에 맞춰 몸을 흔들다 낯선 한국인 기자에게 ‘하이,웰컴’을 외쳤다.
이 상가가 있는 이태원1동 이화시장 길은 아프리카 이주민이 많이 살아 ‘아프리카 거리’로 불린다.
건물 2층에는 아프리카인이 운영하는 옷가게와 식료품점,미용실 등 가게 10여 개가 빽빽이 늘어서 있었다.
아프리카인들은 한국 사회에서 차이나타운 못지않은 지역 공동체를 만들었지만,아직 이들은 이방인 취급을 받는다.
이곳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뷰티(38·여)씨는 “딸이 한국 유치원을 다니는데 아직도 반 친구들이 ‘얼굴이 검다’며 외면한다.집에만 오면 운다”고 말했다.
뷰티씨의 딸은 목소리만으로는 외국인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한국말이 유창했다.
무역업을 한다는 팰릭스(36)씨는 “고국인 나이지리아에는 한국사람이 8천명이 넘게 산다.기술력이 좋고 똑똑해 우리는 한국인을 좋아하는데 이곳 사람들은 우리를 싫어한다”고 꼬집었다.
●아프리카인의 ‘해방구’
애초 아프리카 거리는 미8군 기지 군인들의 쇼핑 지역으로 꼽혔다.
그러나 용산 미군기지 이전이 확정되고 테러 위협으로 미군의 외출이 통제되면서 아프리카 노동자와 상인이 대거 이주해 거리의 성격이 크게 바뀌었다.
대다수가 빈곤층인 이들은 일상사에 쉽게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고 문화생활을 함께 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함께 모여 살려는 성향이 특히 강한 편이다.
거리 주변에는 아프리카인을 위한 교회만 7개나 된다.가장 규모가 큰 ‘마운틴 오브 파이어(Mountain of Fire)’나 ‘워드 오브 페이스(Word of Faith)’ 교회에는 예배시간별로 이주민 70∼80명이 모인다.
용산구청에 따르면 이 거리가 있는 이태원1동을 포함해 이태원 전역에 거주하는 아프리카 국적 구민은 작년 기준으로 740여명에 달한다.
경기도 일대 공장에서 일을 하다 주말에 이태원을 찾는 이들을 더하면 그 수는 1천여명을 넘는다고 구청 측은 추정했다.
●”무조건 범죄용의자 의심”…끈질긴 편견
이태원의 한 아프리카인 교회에 다니는 코트디부아르인 마티스(36)씨는 “절도나 폭력 사건이 터질 때마다 아프리카 출신이라며 무조건 의심을 받는다”며 가슴을 쳤다.
그는 “아프리카인들이 범죄를 저지르려고 한국에 왔다고 다들 생각하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선진국에도 범죄자는 있기 마련이며 국적만으로 편견을 갖는 건 옳지 않다”고 목청을 높였다.
가나에서 온 버나드(23)씨는 “버스를 타면 미국식 영어로 ‘이번 겨울에 뉴욕으로 여행을 할 것”이라며 전화받는 연기를 한다.그래야 사람들이 옆자리에 앉는다”고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경찰에 따르면 작년 국내에서 마약범죄로 검거된 외국인은 태국인 578명,미국인 66명이었지만 국내에 가장 많은 아프리카인인 나이지리아 출신은 7명에 불과했다.
아프리카인 폭력집단이 이태원을 활보한다는 소문과 달리 현재 이런 조직은 아직 포착되지 않았다는 게 검.경찰의 전언이다.
용산경찰서 이태원 지구대의 임영인 대장은 오히려 “치안이 굉장히 안정돼 있다.검문검색을 해도 수배자조차 별로 안 나온다”고 전했다.
●재개발 추진에 ‘나가라’ 눈치도
이태원의 아프리카인들은 ‘하루살이’ 취급까지 당하기도 한다.
용산구가 내년까지 아프리카 거리가 있는 이태원1동과 한남동,보광동 일대의 낡은 상가와 주택을 허물고 2017년께 뉴타운을 건립할 계획이라,아프리카 커뮤니티도 곧 사라질 것이라는 얘기도 나온다.
아프리카 거리 주변에서 부동산업소를 운영하는 김모씨는 “어차피 우리 눈에는 흑인은 다 재개발이 되면 나갈 사람들이라 정을 줄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인근 이화시장의 한 상인도 “아프리카인은 자기들끼리 물건을 주고받으며 자급자족하는 편이라 장사가 전혀 안 된다.차라리 재개발이 되면 상황이 더 나아지지 않을까 싶다”고 했다.
하지만 재개발이 이뤄지면 이태원의 장점인 문화적 다양성을 없앨 것이란 우려의 목소리도 높다.
서울대 황익주 교수(도시인류학)는 “이태원은 다인종,다종족 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인프라를 가장 많이 갖춘 공간이다.인위적인 도시계획으로 아프리카 커뮤니티에 제약을 가하면 부작용이 심각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서울대 환경대학원 조경진 교수도 “이태원은 뉴욕처럼 다양한 인종이 만들어내는 일종의 시험대”라며 “다문화 도시의 장점을 살릴 수 있는 배려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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