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개발시대 버텨낸 민초의 벗
‘남산 위에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 바람서리 불변함은 우리 기상일세~.’서울 남산하면 떠오르는 것은 바로 소나무. 애국가 가사때문에 더욱 강한 인상을 심었다. 그러나 오늘날 남산에서 철갑을 두른 듯 울창한 소나무 숲을 찾아보긴 힘들다. 매연과 미세먼지에 밀려 생육환경이 악화된데다 일제 강점기 이후 대대적으로 행해진 벌목과 개발 탓이다.
| 남산자락의 소나무들이 비온 뒤 물기를 잔뜩 머금고 군락을 이루고 있다. 온갖 풍상을 이겨내고 젖은 어깨를 늘어뜨린 모습이 애처롭기까지 하다. 류재림기자 jawoolim@seoul.co.kr |
혹자는 어느 고장을 가나 ‘앞산’격인 남산은 있다며, 애국가 가사와 서울 남산을 굳이 짝짓는 것을 거부한다. 모진 풍상에도 불구하고 한국인의 꿋꿋한 기상을 자랑했던 소나무는 과연 남산의 상징일까. 역사서들은 서울 남산과 소나무의 남다른 인연을 전하고 있다. 해발 262m에 불과한 남산은 고려 문종 21년(1067년) 이후 역사의 전면에 등장했다. ‘남경’으로 승격한 서울의 공간설정에 중요한 지표가 됐다. 조선시대에는 수백년간 남산 소나무를 관리해온 기록이 곳곳에 남아있다. 왕들은 풍수지리상 남산에 소나무가 무성해야 왕조의 정기가 비축된다고 믿었다. 태종 11년(1411년)에는 장정 3000여명을 동원해 20일간 소나무를 심었다는 기록이 있다. 세조 때는 남산 소나무 보호를 위해 따로 관료와 산지기를 뒀다고 한다.
남산 소나무 숲은 외세 침략과 개발정책으로 크게 훼손됐다. 임진왜란 당시 예장동 일대에 왜군이 주둔하며 남산의 소나무 벌목은 시작됐다. 구한말에는 이곳 ‘왜장터’에서 소나무를 베어낸 뒤 신궁과 신사를 지었다. 소나무 대신 벚나무가 심어졌다. 인근에는 통감관저가 들어섰다.
해방 직후 남산은 좌우 정치세력의 집회장소로 돌변했고, 다시 유흥가로 퇴락했다. 소나무 숲도 훼손됐다. ‘해방촌’으로 알려진 남산 남서쪽 구릉지도 원래는 소나무가 울창한 숲이었다. 옛 중앙정보부 건물들도 소나무 숲을 훼손하고 들어섰다. 남산은 사실 ‘성지’라기보다 서민 애환이 서린 장소였고, 남산 위 소나무들은 빗물에 젖은 무거운 어깨로 이 모든 것을 지켜봐온 셈이다.
●현재 3만1000여그루 자생
서울시에 따르면 현재 남산의 자생 소나무는 3만 1000여그루로 추정된다. 수령 100년 이상의 고목들도 6그루 정도가 지정 보호수로 관리받는다. 여기에 1990년대 남산제모습찾기 사업으로 다른 곳에서 옮겨와 심어진 소나무도 1만 8000여그루에 달한다. 중부푸른도시사업소 관계자는 “남산의 자생 소나무는 겉이 붉고 모습이 약간 굽고 수려한 것이 특징”이라고 전했다. 서울시는 자생 소나무 보호를 위해 아카시아 등 소나무 생장에 지장을 주는 나무들을 베어버리고, 토양 산성화를 늦추는 석회비료를 주고 있다.
안개 낀 달밤을 그린 ‘겸재’ 정선의 ‘장안연월(長安烟月)’에도 어렴풋이 드러난 남산 소나무들. 우연인진 몰라도 “소나무는 힘과 용기의 상징인 동시에 한국의 모습”이라는 사진작가 배병우씨의 소나무사진들도 최근 남산자락의 서울스퀘어(옛 대우빌딩)에서 전시되고 있다.
오상도기자 sdoh@seoul.co.kr
2009-11-27 12:0:0 2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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