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꼽히는 ‘실세’부처건만 기획예산처 직원들은 요즘 일할 맛이 안 난다. 주한미군 공여지 매입을 위한 국고지원 비율 등 ‘경제 논리’가 우선돼야 할 사안들이 ‘정치 논리’ 일변도로 ‘밀려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기획처가 내년 대선 전까지 ‘표심’을 의식한 정치권에 과도하게 휘둘리는 것 아니냐고 우려하는 목소리가 벌써부터 나오고 있다.
지난달 28일 ‘주한미군 공여구역 주변지역 등 지원특별법’을 논의하는 관계부처 실국장회의는 이례적으로 오후 늦게까지 이어졌다.“국고지원 비율을 60∼80%로 늘리라.”는 요구에 기획처는 “선례가 없고, 비슷한 요구가 다른 분야에서도 나올 수 있다.”며 뜻을 굽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날까지의 정부안은 30%에서 최대 50%까지 지원하겠다는 것.7월에 발표된 특별법 시행령의 60∼80%를 기획처 주장에 따라 낮춘 수치다.
그러나 관계부처 실국장회의가 열린 날 오전 허남식 부산시장과 여당 관계자들이 대통령과 면담한 뒤 분위기는 급변했다.
결국 다음날 국무회의에서는 청와대가 원하는대로 의결됐다. 비슷한 상황은 이달 초에도 벌어졌다. 여당은 지난 1일 환경부와 당정협의를 가진 뒤 국립공원 입장료 폐지안을 오는 정기국회에서 처리하겠다고 불쑥 발표했다. 사전 협의도 없었다.
‘국립공원 입장료는 폐지 불가’라는 것이 그동안 기획처의 의지였다. 올해 국립공원 관리에 필요한 예산 1299억원의 68%인 883억원을 국고에서 지원하고 있는 상황에서 22%에 이르는 국립공원 입장료 289억원을 포기한다면 ‘수익자부담 원칙’에 어긋나고, 재정 부담도 늘어난다. 하지만 언론에 일제히 보도된 ‘여당의 결단’을 거스르기도 어려워 ‘울며 겨자먹기’로 따르는 분위기다.
기획예산처 관계자는 “영국이나 일본 등 선진국에서는 정치권이 예산 부처와 합의 없이 재정에 관한 결정을 내리는 사례가 없다.”면서 “정치권도 건실하고 합리적인 재정 운영이 우리 사회를 위해서 중요하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을 것”이라고 안타까워했다.
이두걸기자 douzirl@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