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숙인으로 태어나는 사람은 없습니다. 평범한 사람들이 사업에 실패하고, 가정 불화로 집을 나왔는데 돈이 없으면 한뎃잠을 자는 거지요.”
박씨도 1997년 금융위기 때 사업에 실패해 집에서 나왔다. 그후 청량리역 부근 1평짜리 쪽방을 전전하며 막노동으로 생계를 이어갔다. 건설경기가 나빠져 허탕치는 날이 자꾸 늘어가자 월세(20만원)를 낼 수 없었고, 결국 길거리로 쫓겨났다. 혜화동 대학로 긴 의자에서 신문지를 덮고 잠을 청했다. 오가는 사람들의 싸늘한 시선이 추운 날씨보다 견디기 힘들었다. 노숙에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방법을 몰랐다. 그러다 복지단체가 쉼터를 제공한다는 것을 알고 2005년 9월 구세군에서 운영하는 ‘충정로 사랑방’을 찾아갔다.
“규율이 싫어 쉼터로 입소하지 않는 노숙인도 있습니다. 술도 맘대로 마시지 못하고, 아침에 일찍 일어나야 하고…. 저는 단체생활인데 그 정도는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쉼터에서 생활하며 자활을 꿈꾸었다. 내 힘으로 돈을 벌어 내 집에서 먹고 자자는 소박한 꿈이었다. 그러나 일자리가 없었다. 간혹 있다고 해도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퇴짜를 맞았다. 박씨는 “체력에는 자신이 있는데 이력서 나이만 따지는 풍토가 야속했다.”고 했다. 지난해 3월 희소식이 날아들었다. 서울시가 ‘노숙인 일자리 갖기사업’을 추진한다는 것이었다. 지하철 9호선 건설현장 막노동이었지만, 박씨는 망설임 없이 지원했다. 일당 5만원은 서울시와 건설사가 절반씩 부담했다. 그는 12월까지 평일에 빠짐 없이 일했고 ‘성실한 근로자’로 표창까지 받았다. 그 사이 박씨 통장에는 700여만원의 ‘거금’이 쌓였다.
“건설현장에서 노숙인 출신이라고 무시하고 멸시도 받았습니다. 새파랗게 젊은 사람들이 반말도 하더군요. 그래도 일한다는 것 자체가 행복해 힘든 줄 몰랐습니다.”
박씨는 마침내 꿈을 실현했다. 지난 1일 서대문구 대신동에 자택(9평)을 마련한 것이다. 집은 대한주택공사가 1997년에 지은 임대주택으로 보증금 220만원, 월세 10만 2400원짜리다. 박씨는 서울시의 지원을 받아 자활에 성공한 첫 노숙인이 됐다.“첫날밤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기쁘기보다는 불안하더군요.‘일을 계속해서 이 집을 지켜낼 수 있을까.’하는 생각에 사로잡혔습니다.”
박씨는 올해도 서울시 일자리사업에 참여하고 있지만, 돈도 없이 홀로 늙어간다는 것이 조마조마하다고 했다. 그래서 새로운 목표를 세웠다. 허리띠를 졸라매 전셋집(1600만원)을 얻는 것이다. 술·담배를 줄이고, 외식도 아예 끊었다. 교통비를 아끼느라 무료 승차할 수 있는 지하철만 타고 다닌다. 가족과 재결합하면 되지 않느냐고 묻자 “가족 얘기는 하고 싶지도, 할 수도 없다.”고 고개를 저었다. 말 못할 사연이 숨어 있는 듯했다.
‘충정로 사랑방’ 김욱 사회복지사는 “서울시가 매월 저축액의 1.5배를 기부금으로 보태주는 빈곤층 지원사업을 올해 시작했다.”면서 “박씨처럼 자활을 꿈꾸는 노숙인들이 도움을 받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정은주기자 ejung@seoul.co.kr
[용어클릭]‘노숙인 일자리 갖기 사업’ 서울시가 지난해부터 추진한 노숙인 자립지원 정책이다. 노숙인에게 일자리를 제공, 안정적 수입을 올리고 자립하도록 돕는다. 지난해 1400개 일자리를 제공했고, 올해도 지난 5일부터 670개를 운영한다. 대부분 건설현장직이며 인건비는 서울시와 고용자가 절반씩 부담한다. 하루 8시간씩 근무하면 60만∼100만원을 지급한다.
2007-3-19 0:0:0 1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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