탕, 탕, 탕…. 임병희(77) 할아버지의 망치질 소리가 적막한 대장간을 울리고 있다. 지나가던 행인들이 망치질 소리에 가게를 기웃거리다가 이내 가던 걸음을 서두른다.
“우리가 마지막이야. 내 대에서 대장간 일이 끝나겠지.(대장간 일을)배우려는 사람도 없고, 누가 이런 험한 일을 하려고 하겠어.”
한국전쟁 이후 이곳에 터를 잡아 60년 대장장이로 살아온 임 할아버지가 내뱉은 독백이다.
한때 ‘대장장이 마을’으로 불렸던 중구 쌍림동 ‘대장고개’. 일제시대 때에는 쌍림동∼충무로5가 고개에 망치질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100곳이 넘는 대장간이 고개 언저리 좌우로 늘어서서 대장고개, 혹은 ‘풀무질고개’로 불렸을 정도다.
그러나 지금은 광희문 끝자락에 10여곳만이 남아 옛 영화의 흔적만을 보여주고 있다. 남아 있는 대장간들도 세월의 흐름만큼이나 달라진 모습을 드러낸다. 시설이 기계식으로 바뀌어 ‘손품’은 덜 들어 보이지만 예전에 봤던 대장간과는 꽤 거리가 있다. 간판 이름도 대장간이 아니라 철공소다.
대장간 하면 당연히 있어야 할 ‘풀무’가 없다. 풀무는 불을 피울 때 바람을 일으키는 기구다. 손으로 돌리는 손풀무와 발로 밟아 바람을 일으키는 발풀무가 있다. 지금은 전동기로 불을 피운다. 그나마 지핀 불을 담는 화덕만이 대장간 분위기를 풍긴다.
임 할아버지는 “전통적 대장간이 사라진지 오래됐다.”면서 “덕분에 힘든 일은 많이 줄었다.”고 설명했다.
우진철공소 관계자는 “30년 전에는 10㎏짜리 망치로 13시간 이상 일을 했다.”면서 “요즘 그렇게 일하면 미친 소리 듣겠지만 당시에는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고 했다.
대장간에서 주로 생산하는 것은 농기구나 건축 도구, 문고리 등의 간단한 수제품들이다. 예전보다 제품 수는 대폭 줄었다. 값싼 중국산 제품이 이곳에서도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그나마 수제를 찾는 단골 손님들 덕분에 명맥을 유지한다고 한다.
이곳 대장장이의 평균 연령은 60대. 가장 젊은(?) 대장장이가 50대 후반.30년 이상 망치질로 잔뼈가 굵은 전문가들이다. 망치질도 리듬을 탄다. 다들 후계자가 없어 ‘1인 사장’이다. 직원이자 사장인 셈이다.
대장간과의 인연도 갖가지다. 임 할아버지처럼 한국전쟁으로 흘러들어온 이가 있는가 하면 대장간 일이 싫어 뛰쳐나갔다가 배운 게 이 짓이라서 결국 다시 돌아온 이도 있다. 광주철공소 관계자는 “어쩔 수 없는 거고, 다 운명이지. 그래도 밥 빌어먹지 않고 살려면 이 짓이라도 해야지.”라며 답답함을 토로했다.
망치질로 자식 4명의 대학 공부와 결혼을 시켰다는 임 할아버지는 “대장간 일로 60년간 입에 풀칠했으니 서운한 것도 아쉬운 것도 없지만 대장간 일을 배우겠다는 사람이 없으니 허전하다.”고 넋두리를 늘어놓았다.
김경두기자 golders@seoul.co.kr
2007-6-5 0:0:0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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