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이천 요금소를 나와 3번 국도를 따라 20여분을 달리자 숲 그림자 짙은 건물 한 채가 눈에 들어왔다.
행정구역상 경기도 여주군 가남면 심석1리 여주제일고는 지난 69년 실업계 고교로 개교했지만 2002년부터 지역민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인문계 2개반을 편성, 종합고로 운영되고 있다.
| 낙엽 속에서 책을 읽는 아이들의 미소가 나… 낙엽 속에서 책을 읽는 아이들의 미소가 나무를 닮았다.여주제일고 학생들이 학교 안 작은 숲,개척공원의 나무 아래에서 책을 읽으며 얘기를 나누고 있다. 여주 이언탁기자 utl@seoul.co.kr |
정재석(60) 교장은 메타세쿼이아를 쓰다듬었다.“33년 전에 심었는데 벌써 이렇게 컸습니다.” 5층 건물 높이의 나무 밑동을 어루만지는 그의 손이 마치 학생들 머리를 쓰다듬듯 했다.
그가 학교에 나무를 심기 시작한 것은 197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교사로 첫 발을 뗀 초임 교사였던 그는 교장과 교감에게 학교에 나무를 심을 것을 제안했다. 인성교육을 위해서 나무만큼 좋은 것은 없다는 확신에서였다. 교장과 교감은 쓸데없는 일을 벌인다며 반대했다. 그러나 그는 재단이사장을 직접 만나 설득에 성공했다.
여주제일고는 서울에서 한국세정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는 회계사 김연수 이사장이 지난 1969년 세웠다.1968년 여주제일중이 서울 사람에게 팔릴 위기에 놓이자 이 곳이 고향인 김 이사장이 34살의 나이에 중학교를 인수한 뒤 그 옆에 고교를 세웠다. 지방 교육을 외지 사람에게 맡길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고향의 후학 양성에 관심이 많았던 김 이사장은 당시 평교사였던 정 교장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정 교장은 서울 천호동 묘목원에서 메타세쿼이아 어린 나무 200그루를 사다 심기 시작했다. 대학에서 농공학을 전공한 것이 큰 도움이 됐다. 그는 “당시에는 회초리 같은 작은 나무였지만 지금은 한 그루를 옮기려면 30t 트럭으로도 어려울 것”이라고 했다. 나무를 가꾸는 그의 노력에 다른 교사들과 학부모들도 동참했다.
●30여년간 나무심어… 감성교육에 큰 도움
매년 식목일이 되면 학부모들과 지역 유지, 졸업생들이 나무를 심었다. 가꾸는 일은 학생과 교사들의 몫이었다. 각자 맡은 나무에 물을 주고 거름을 줬다.1980년에는 중학교 앞 운동장 9000㎡를 아예 공원으로 꾸몄다. 설립 이념을 살려 ‘개척공원’이라고 이름 붙인 이 공원에 뿌리를 내린 나무들은 전나무와 향나무, 목련, 은행, 대추, 산수유, 소나무, 느티나무, 단풍나무 등 수십종, 수백 그루에 이른다. 지금도 매년 4월5일이 되면 졸업생과 지역민들은 학교에 모여 나무를 심는다. 학부모들은 막걸리와 떡을 장만해 손님을 대접한다.
학교의 정성이 알려지면서 군부대도 나무심기를 도왔다.99년 자매결연을 맺은 육군 제3221부대는 중장비를 동원해 생태학습장 조성을 도왔다. 학교 전체는 서서히 공원으로 탈바꿈했다. 개척공원과 소나무숲, 야생화 꽃길, 연못, 생태학습장 등을 고루 갖춘 ‘숲속의 학교’였다.
학생과 교사가 나무를 가꾸면서 학교 분위기도 달라졌다. 교사들은 학생들을 꾸짖기 전에 함께 교정을 산책하며 얘기를 나눈다. 박흥모(42) 교사는 “나무 아래서 대화를 나누다 보면 교사인 나부터 감정을 추스를 수 있고, 학생들도 마음을 터놓고 얘기를 하게 된다.”면서 “전인교육과 감성교육에 큰 도움이 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2학년 정유진(18)양은 “공부하다 머리가 아프거나 짜증이 나도 창 밖 나무를 보면 금세 기분이 풀어진다. 무엇보다 학교 분위기가 마음에 든다.”고 했다.
이 학교의 인성교육은 나무 가꾸기에 그치지 않는다. 가정적으로 고민이 많은 아이들에게는 교직원과 학생이 일대일 자매결연을 맺어 지도하고 있다.‘도울학생 자매결연’ 프로그램이다. 정 교장은 “걱정거리가 많은 학생들에게 ‘학교에 내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는 선생님 한 분이 있다.’는 생각을 갖도록 해 즐겁게 학교생활을 하도록 하자는 취지”라면서 “한 그루의 나무를 가꾸듯이 교사들도 아이들을 맡아 가꿔 올바르게 키우자는 생각에서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나무를 기르듯 학생을 가르치면서 학생들의 생활은 몰라보게 달라졌다. 가장 두드러진 성과는 결석이 거의 사라졌다는 점이다. 지난 2002년 1년 동안 개근한 반은 전체 24개반 가운데 4개에 불과했지만 지난해에는 21개반 중에 9개로 늘었다. 올해는 현재 18개반 가운데 11개반이 전원 개근을 기록하고 있다. 전교생으로 따지면 616명 가운데 607명이 결석 없이 학교를 다니고 있다.
●교사 먼저 공부… 논문 30여편·논문집 4권
인성교육을 강조하지만 그렇다고 학생들의 실력을 쌓는 데 소홀한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교사들이 솔선수범이다. 이 학교 교사들은 모두 논문을 쓴다. 교사들은 3∼4년에 한 차례 아이들 교육에 도움이 될 만한 연구성과를 논문으로 써서 돌려읽는다. 현재 발간된 논문은 30편, 논문집만 4권에 이른다.
방학이 되면 전 교사가 1박2일 연수를 받는다. 교사들은 ‘되돌아본 나의 학교생활’이라는 주제 발표를 통해 한 학기의 경험을 나누고 반성한다. 매달 한두 차례 동료들의 수업을 평가하고 평가받는 동료장학과 자신의 수업장면을 비디오로 촬영해 스스로 평가해 보는 자기장학도 교사들의 실력을 올리는 비책이다. 교사부터 스스로 공부하는 분위기다.
교사들은 학생들을 위해 팔을 걷어붙였다. 사교육을 접하기 어려운 ‘시골 학교’의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서다. 각 교과별 교사가 매일 한 문제씩 출제, 매년 책으로 엮어 나눠주는 문제집은 웬만한 시중 참고서보다 알차게 만들어졌다.
대학 진학을 원하는 실업계 학생들을 위해 2학년 때부터 실업계 4개반 가운데 1개반을 ‘계속형 학급’으로 운영하고 있다. 이 반에서는 실업계 전공과 함께 대학 진학을 위한 수능 준비를 별도로 할 수 있다.
이 학교에 배치받은 예비 고1을 위한 위한 선행학습 프로그램도 운영한다. 중학교 마지막 겨울방학 중 한달 반 동안 국·영·수를 중심으로 선생님들의 강의를 들을 수 있게 했다. 입학한 뒤에는 성적이 우수한 학생 가운데 희망자를 받아 기숙사를 제공한다. 도서관과 교실은 학생들에게 24시간 개방된다. 공부를 하려는 학생들에게 학교가 모든 것을 해줘야 한다는 정 교장의 소신 때문이다.
지난 4월부터는 중국어 원어민 교사 한 명을 초빙, 교과재량 및 특기적성 시간을 활용해 전교생에게 중국어를 가르치고 있다. 내년부터는 희망자를 받아 기숙사에서 중국어 교사와 함께 생활하는 연수반을 별도로 운영할 계획이다.
공부하는 교사에게 배우는 학생들이 공부를 게을리 할 리 없다. 교장과 교사들의 노력은 실력있는 학생이라는 열매를 거두고 있다. 올해 첫 졸업생을 배출하는 인문계에서는 수시 1학기에서만 한국외국어대와 건국대, 단국대, 숙명여대, 숭실대 등에서 37명의 합격자가 나왔다. 실업계는 지난 99년부터 5년 연속 100% 취업률을 기록하고 있다. 워드프로세서 1급과 정보처리, 컴퓨터기능사 등 자격증 취득률도 200%에 육박한다. 학생 한 명이 평균 2개의 자격증을 따서 졸업하는 셈이다.
학교의 노력이 알려지면서 이 학교로 진학하려는 중학생도 적지 않다. 현재 중학교 내신 상위 55% 안에 들어야 이 곳으로 진학이 가능하다. 최인규 교감은 “매년 여주와 이천 등 인근 중학교 교사들로부터 진학 상담이 들어올 정도로 학교의 인기가 높다.”고 말했다. 익명의 졸업생은 매년 1000만원을 학생들의 장학금으로 내놓고 있다.
사단법인 아름다운학교 운동본부는 최근 전국 초·중·고를 대상으로 한 공모전에서 올해의 아름다운 학교로 여주제일고를 선정했다. 학생과 교사, 학부모가 뜻을 합쳐 아름다운 학교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노력을 인정한 것이다.
여주 김재천기자 patrick@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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