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미리내집, 다세대·생활주택으로 다양화

통계청 발표 ‘2020 고령자 통계’ 분석

서울 서남권 ‘극한 폭우’에 침수취약지 살핀 진교

공사 관계자들 “한밤 파쇄석 500t 운반” 스카이칠십이 “금시초문, 말도 안 된다” 인천공항공사 “사실 확인 땐 법적 조치”

서울 ‘탄천변 동측도로’ 구조 개선 첫삽…교통사고

평균 27.9년… 부처별 최대 13년 11개월차 행복도시건설청 17년 4개월로 가장 빨라 세종시 평균 17.6년… 전남은 28.3년 걸려

서울 “야간·빗길도 안전하게”… 태양광 LED 도

통계청 발표 ‘2020 고령자 통계’ 분석

[우리지역 명물] 우이동 ‘봉황각’

기사 읽어주기
다시듣기
폰트 확대 폰트 축소 프린트하기
우이동 산길을 오르다 보면 봉황각(鳳凰閣)’이라고 불리는 단아한 기와 건물을 만날 수 있다. 조선시대 기와의 아름다운 선에 취하다 건물의 사연을 알게 되면 일제에 빼앗긴 나라를 되찾으려는 선열의 비장함에 고개를 숙이게 되는 곳이다.


봉황각은 강북구 우이동 버스 종점에서 도선사 입구로 300m쯤 올라가다 길 왼쪽 양지바른 곳에 있다. 넓이 92.5㎡에 정면 5칸의 팔각 기와지붕 건물이다. 가운데에 시원한 대청이 있고 오른 편의 두 방은 돌기둥이 떠받쳐 방 안에서도 뜰이 잘 보이도록 했다. 소나무가 감싸고 있는 마당에서 ‘삼각산’을 바라보면 백운봉(백운대), 인수봉, 국망봉(만경대) 등 3개 봉우리가 뚜렷하게 보인다.

봉황각은 경술국치(庚戌國恥) 2년 뒤인 1912년 의암 손병희 선생이 “10년 안에 빼앗긴 나라를 되찾겠다.”며 당시 경기 고양군 수양면 우이동 땅에 세웠다. 산속 9만 2231.8㎡ 부지에 봉황각을 비롯한 13개동의 건물을 지었다.

이곳에서 항일독립운동을 이끌 젊은이 483명을 가르치고 수련시켰다.3·1운동 때 민족대표 33명 가운데 15명이 봉황각 출신이다. 최남선 선생은 봉황각에 한동안 머물며 독립선언서를 작성했다. 애국지사들은 3·1운동 직전에 거사를 모의했다.

봉황각이라는 이름은 동학 창시자 최제우의 시에 나오는 ‘봉황’에서 따왔다. 봉황은 성인(聖人)의 탄생에 맞춰 세상에 나타나는 전설의 새로, 나라를 구할 인재를 기다리는 마음을 담았다. 현판은 중국 명필들의 필체를 빌려 수련생 출신 오세창 선생이 썼다. 일제는 3·1운동 이후 봉황각만 두고 나머지 건물들을 모두 헐어 버렸다.

서울시는 봉황각을 선열의 뜻을 기려 유형문화재 2호로 등록했다. 강북구는 매년 3월1일 청소년 300여명이 솔밭공원에서 봉황각 입구까지 태극기를 흔들며 행진하는 3·1운동을 재현하고 있다. 봉황각 앞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삼창도 한다. 봉황각에서 50m 떨어진 손병희 선생 묘소 앞에서는 주민을 위한 마당극, 택견 공연 등이 열린다.

김경운기자 kkwoon@seoul.co.kr
2007-8-28 0:0:0 11면
Copyright ⓒ 서울신문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페이스북 트위터 밴드 블로그

Leaders Today

서울시 독립유공자 후손 초청… 1년 전 약속 지킨

이달 선생 장녀 이소심 여사 등 19명 초청 1년 전 충칭 임시정부에서 초청 약속 지켜져

“LH 손잡고 주거 환경 혁신”… 정비사업 가속도

성북구·LH, 사업 신속 추진 협약

종로, 첫 향토무형유산으로 ‘춘앵전’ 지정

박은영 교수 보유자 인정서 수여

전국 첫 자립준비청년 봉사단체… 은평 ‘은플루언서’

구·대한적십자사 협력… 결성식 인도주의 활동·전문 교육 지원 나눔과 연대의 새로운 모델로

자료 제공 : 정책브리핑 korea.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