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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공무원] 아시아 한류의 원조 이수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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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서 한시 교류한 베트남 사신
본국에 퍼뜨려 시집 품귀 현상
日·태국서도 “읽고 싶다” 대유행
한류의 원조가 케이팝이라고만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조선시대에도 겸재 정선은 중국에서 그의 그림을 사러 온 중국인이 집 앞에 장사진을 칠 만큼 한류스타였다. 조선의 또 다른 한류스타로는 이수광이 있다. 조선시대 최초의 문화백과사전으로 평가받는 ‘지봉유설’의 저자 이수광은 베트남에서 한시로 특히 인기가 높았다.

1604~1607년 조완벽이 안남국(安南國·현재의 베트남)을 세 차례 방문하기 전까지는 양국의 사신들이 중국 베이징에서 만나는 것이 교류의 전부였는데, 이수광은 당시 안남국 최고의 인기스타였다. 요즘 우리나라 아이돌 가수들이 중동처럼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나라에서 스타가 되기도 하는 것처럼 이수광도 평생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안남국에서 최고의 인기인이 돼 있었던 것이다.

선조 30년인 1597년 30대 초반의 젊은 관료였던 이수광은 진위사로 베이징에 파견돼 50여일 간 사신단 숙소인 옥하관에 머물렀는데, 여기서 역시 안남국 사신으로 온 풍극관을 만났다. 서로 문재(文才)임을 한눈에 알아본 두 사람은 통역을 물리고 직접 필담을 나누며 시를 주고받았다. 귀국한 풍극관은 이수광의 한시를 널리 퍼뜨렸고, 머지않아 이수광의 시집은 돈 주고도 사지 못할 만큼 인기를 끌었다. 안남국 유생들이 이수광의 한시를 밑줄 쳐가며 공부할 정도로 문학 교과서가 됐다.

이 같은 사실은 정유재란 때 일본에 끌려가 노예생활을 하다 무역상의 눈에 띄어 1604년부터 세 차례나 안남국을 방문하고 귀국한 조완벽에 의해 국내에 전해졌다. 이수광의 시가 얼마나 인기였는지는 조선왕조실록, 이지항의 ‘표주록’, 안정복의 ‘목천현지’ 등을 통해 전해지고 있으며, 이수광의 ‘지봉유설’에도 상세히 소개됐다.

조완벽은 진주 출신의 선비로 세 번째 안남국 방문을 마치고 일본 교토에 있던 중 때마침 이곳에 쇄환사로 왔던 여우길 일행을 만나 10여년만인 1607년 귀국할 수 있었다. 고향에 돌아온 조완벽이 자신의 경험을 친구 김윤안에게 전했고, 김윤안은 정사신에게, 정사신은 이수광에게 이를 전해 이수광은 자신의 지식과 경험을 20권의 책으로 정리한 ‘지봉유설’ 이문(異聞)편에 깨알 같은 자기 자랑을 실을 수 있었다.

최중기 명예기자(국가기록원 홍보팀장)
‘인조실록’ 19권 1628년 12월 26일자에는 이날 타계한 이수광에 대한 추모 글이 있다. “수광의 자는 윤경, 호는 지봉인데 약관에 급제하여…그가 사신으로 중국에 갔을 때 안남, 유구(현 오키나와), 섬라(현 태국) 사신들이 모두 그의 시문을 구해 보고 자기 나라에 유포하기까지 했다. 우리나라 사람으로 일본에 포로로 잡혀갔던 자(조완벽)가 상선을 타고 교지(交趾, 당시 안남국은 2개로 분열돼 내전 중이었는데, 그중 한 세력)에 갔었는데 교지인들이 그의 시를 내보이며 ‘그대는 당신 나라 사람인 이지봉을 아는가?’하였다. 이처럼 다른 나라 사람까지도 그를 존중하였다.”

실록에는 더 언급이 없지만, 20살에 일본에 끌려 온 조완벽이 이수광의 존재를 알지 못하는 것이 당연한데도 안남인들이 몹시 실망스러워했다는 내용이 몇몇 문헌에 전해져 온다.

조선 사신이 이수광이 얼마나 인기스타인지 직접 확인하기도 했다. ‘숙종실록’ 23권 1691년 12월 5일자에는 연경에 사신으로 다녀온 민암과 강석빈의 보고이다. 안남국 사신에게 이수광의 시를 알고 있느냐 물었는데, 능히 알고 있어 함께 암송까지 했다는 내용이다. 풍극관에게 시를 지어준 지 94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이수광의 시가 안남국에서 인기였음을 확인한 것이다.

최중기 명예기자(국가기록원 홍보팀장)

2017-04-24 3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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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제공 : 정책브리핑 k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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