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지도자 길러낸 ‘항일의 성지’
유관순, 서대문형무소, 제암리 학살사건.3·1운동에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과 사건들이다. 하지만 3·1운동의 출발점이었던 봉황각은 그 중요성에 비해 덜 알려진 것 같다.봉황각은 의암 손병희 선생이 3·1운동 지도자들을 키워낸 곳이다. 지난달 28일 강북구 우이동 산 자락에 있는 봉황각을 찾았다. 봉황각은 삼각산 도선사로 올라가는 언덕에 있다. 이곳은 현재 도로가 나 있지만 과거엔 인적이 뜸한 산 속이었다고 한다. 의암 선생은 이 비밀 장소에서 3·1운동을 계획했다.
처음 본 봉황각에서는 의연함이 느껴졌다. 큰 처마와 단단해 보이는 문살에서 뜨거운 기운이 느껴졌다. 봉황각은 ‘乙’모양으로 동학에서 하늘과 땅을 뜻하는 ‘弓乙’(궁을)의 ‘乙’을 형상화한 것으로 보인다. 문을 열자 의암 선생이 눈을 크게 뜨고 내려다 보고 있었다. 영정 사진이지만 눈빛은 형형하게 살아 있다. 요즘도 천도교 교인들이 여기서 수련을 한다고 한다. 과거에 손병희 선생이 교회 간부들과 했던 모습을 상상해 봤다.
●손병희선생이 1912년 세워
의암은 먼저 경술국치일에 교인들 앞에서 “10년 뒤 주권을 되찾겠다.”면서 “계획이 있으니 나를 따라달라.”고 밝혔다고 한다. 그리고 토목공 21명을 모아 1912년 봉황각을 세운다. 여기서 보국안민(報國安民)을 내세우고 거사를 위해 천도교 지도자들을 교육시킨다.
일본의 삼엄한 감시가 있었지만 봉황각에서 독립운동을 계획할 수 있었던 것은 천도교가 종교단체이기 때문이다. 의암은 독립운동은 종교 지도자들이 중심이 돼야 한다고 믿었다. 이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슬람의 자살 폭탄 테러와 베트남 전쟁 때 지도층에 항거하며 스스로 화형을 감행한 승려들이 떠올랐다.
실제로 3·1운동 당시 봉황각에서 교육받은 천도교 지도자들은 가장 용기있는 행동을 보였다고 한다. 평북 정주 천도교 지도자였던 최제일은 오른손에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외치자 일본 군경은 그의 오른팔을 잘랐고, 그가 다시 왼손으로 태극기를 들자 또 왼팔을 자르고, 다시 입에 태극기를 물자 목을 쳤다고 한다. 교회에 갇힌 채 총격을 당하고 불에 타 죽은 제암리 희생자의 상당수도 천도교인이었다고 한다.
●상하이 임시정부에 자금도 전달
의암 선생도 3·1운동으로 일본 군경한테 갖은 고초를 당했다.1920년 병 보석으로 나왔을 때 폐인으로 쓰러진 채 들것에 실려나왔다고 한다.1922년 5월 건강을 회복하지 못 하고 세상을 뜨기 전까지 상하이 임시정부에 자금을 전달하는 데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고 전해진다.
그는 현재 봉황각 바로 옆 언덕에 묻혀 있다. 처음에는 일본의 감시로 형편없는 묘소였는데 광복 후 생전에 학교를 설립하는 데 의암 선생한테 큰 도움을 받은 고 조동식 박사가 은혜를 잊지 못 하고 현재와 같은 큰 묘로 개장하고 탑골공원에 그의 동상을 세웠다고 한다.
또 백범 김구 선생도 광복 후 귀국하자마자 이곳을 찾았다고 한다. 백범은 임시정부 요인들과 함께 “이 분이 아니었다면 우리가 어떻게 버텼겠느냐.”면서 눈물을 글썽였다고 한다.
강북구청은 봉황각의 의미를 뒤늦게나마 깨닫고 2004년부터 봉황각 3·1독립운동 재현 행사 때 관내 인사와 학생들과 함께 ‘3·1절 만세 운동 재현 행사’를 벌이고 있다. 그러면서 거리 주변 음식점 주인들에게 봉황각이 꽤 알려졌다. 사실 그 전까지만 해도 인근 사람들은 도선사는 알아도 봉황각은 잘 몰랐다고 한다. 그동안 봉황각이 역사적 의미에 비해 제대로 평가받지 못 했다는 걸 생각하게 했다.
다행히 풍수지리학적으로 이곳 봉황각 자리와 의암 손병희의 묘소는 명당이라고 한다. 주변이 삼각산에 둘러싸여 있는 것이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에서 그 분들의 힘찬 기운이 흘러나와 나라에 도움이 되길 기원해 본다.
글 박지윤기자 jypark@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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