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송파구 청소년 문화공간 우뚝
지난 15일 오후 4시 서울 송파구 성내천로 진미식품이라는 상호를 내건 회색빛 건물 3층. 유리문을 열고 들어서니 고소한 머핀 냄새가 코끝을 간지럽게 했다. 대형 오븐 앞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고사리손들이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60평(198㎡) 규모의 널찍한 공간을 휘젓고 다니며 빵을 만드는 주인공은 문덕초, 마천초 등 인근 초등학교 3, 4학년 청소년이다.이들을 대상으로 제빵 수업을 진행하는 사단법인 ‘다같이함께하는울타리’(이하 다우리)는 3년 전 송파구에서 추진한 ‘또래울’로 지정됐다. 또래들이 모이는 울타리의 줄임말로, 구가 지역의 민간·공공 유휴시설을 청소년을 위해 개방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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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파구 소재 초등학교에 다니는 청소년이 15일 사단법인 ‘다같이함께하는울타리’에서 운영 중인 ‘또래울’을 찾아 머핀을 만들고 있다. |
송파구는 2015년 1월 서울 시내 25개 자치구에서 처음으로 아동·청소년 업무를 전담하는 부서인 ‘청소년과’를 신설했다. 박춘희 송파구청장은 같은 해 4월 “지역에 청소년이 안전하고 즐겁게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공간이 많아져야 건강하고 행복한 도시가 될 수 있다”며 ‘또래울’ 사업을 본격 추진했다. 적극적인 공간 확보에 나서 현재 31개소를 운영 중이다.
주말엔 목회활동이 이뤄지는 교회지만, 주중엔 청소년 누구에게나 문을 여는 ‘다우리’는 지역이 자랑하는 대표적인 ‘또래울’이 됐다. 요일에 따라 인근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에 재학 중인 청소년 대상 수업이 진행된다.
내용만 보면 사실상 수업이라기 보다 ‘놀이터’에 가깝다. 구로부터 소정의 재료비를 지원받아 다우리를 실질적으로 운영하는 최돈회 목사 부부는 관찰자 역할을 자처하기 때문이다. 밀가루 계량부터 빵 위에 토핑을 얹는 단계까지 청소년 자율에 맡긴다. 수학 공식이나 영어 문법처럼 반드시 따라야 하는 규칙이 없다. 다우리의 인기 요인이기도 하다.
13만 청소년 ‘꿈의 도시로’
만드는 빵의 종류도 쿠키, 티라미수 케이크, 마카롱 등 다양하다. 최 목사는 “웬만하면 제빵 과정을 아이들 스스로 하도록 내버려 둔다”면서 “직접 구운 빵을 집으로 가져가 가족, 친구들과 나눠 먹을 수 있게 함으로써 청소년이 성취감을 느끼는 것은 물론, 자존감 회복에도 상당한 도움을 받는다”고 귀띔했다. 구 관계자는 “학원에 가지 않는 청소년이 오락실, PC방 말고도 제빵과 같이 색다른 체험을 하면서 여가를 즐길 수 있다는 점이 ‘또래울’의 가장 큰 장점”이라고 설명했다. 다우리에서 생산된 빵은 오금동 주민센터를 통해 거여·마천 지역의 공동생활가정 등 취약계층에 무료로 전달된다.
송파구가 ‘또래울’을 시작하기 전인 2014년에는 지역에 아동·청소년에게 개방된 시설이 여느 자치구처렴 송파청소년수련관과 마천청소년수련관 2곳으로 역부족이었다. 청소년 인구만 13만명에 다다르자, 박춘희 구청장의 고민은 깊어졌다. 전체 인구가 67만명인 점을 고려하면 구민 10명 중 2명(19.4%)은 청소년인 셈이다. 구민 대토론회에서도 청소년이 방과후 여가를 보낼 수 있는 장소가 턱없이 부족하다는 문제가 제기됐다. 한정된 예산을 가지고 공간을 계속해서 늘릴 수 있는 대안으로 나온 것이 ‘또래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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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춘희(오른쪽 두 번째) 송파구청장이 지난 9일 위례광장로 트랜짓몰 광장에서 열린 행복플러스 축제에 참가해 ‘또래울’ 청소년이 제작한 캘리그라피 작품을 선물 받은 후 함께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송파구 제공 |
구는 삼전동에 기부채납 받은 부지를 ‘행복 또래울’로 활용 중이다. 방송 업무 경력이 있는 구민이 재능기부를 통해 청소년이 평소 접하기 어려운 카메라 작동법 등을 가르친다.
지난 9일에는 각 또래울의 한 해 활동을 마무리하는 연합 축제인 ‘아동·청소년 행복플러스’가 개최되기도 했다. 청소년들이 갈고 닦은 실력을 뽐내고 체험부스를 열어 다양한 또래울을 경험해보도록 마련한 자리였다. 송파구는 이런 노력을 인정받아 지난해 12월 유니세프 한국위원회로부터 국내 자치단체 중 6번째로 아동친화도시 인증을 받았다.
내년 하반기에는 잠실본동에 지하 2층, 지상 8층, 연면적 2400㎡(726평) 규모의 청소년 문화의 집을 개관할 예정이다. 북카페, 체력단련장, 실내암벽장, 캠핑장 등 여가 문화공간과 개인연습실, 동아리실, 자기주도학습센터 등 재능 공간을 갖춰 기대를 모으고 있다. 학교밖청소년지원 조례 제정 결실
22살 때 용산공고에 검정고시를 접수하러 갔다가 처음 송파 꿈드림센터를 알게 됐다는 정서은(여·가명)씨는 초등학교 때부터 수면장애를 앓았다. 늘 고성과 욕설, 폭력이 오가는 가정환경인데다, 정씨가 초등학교 6학년 때 이혼하신 부모님은 어느 한쪽도 정씨를 책임지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버림받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컸다는 그는 중학교 시절 밤늦게까지 친구들과 어울리며 흡연을 하는 등 일탈을 일삼았다. 결국 출석 일수 부족으로 유급됐다가, 아예 학교를 그만두게 됐다. “집에서도 버린 자식이니, 학교에서도 버려야지”라는 주임 교사의 말은 정씨에게 잊혀지지 않는 상처로 남았다. 난생처음 조건 없이 자신을 사랑해주는 강아지를 기르며, 검정고시를 치러 독립해야겠다고 결심한 정씨는 지난해 2차례 응시 끝에 중학교 검정고시, 올 4월 고등학교 검정고시에 합격했다. 꿈드림센터에서 연계해준 카페에서 매니저로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활비를 벌고 있다.
정씨는 “처음엔 나이도 어린 꿈드림 센터 선생님들의 관심이 귀찮고 짜증 나기도 했다. 중학교 졸업장이나 따자는 가벼운 마음으로 왔는데, 지금은 담당 선생님에게 30대엔 애견 카페를 차리고 싶다는 꿈을 털어놓고 얘기할 정도로 의지하고 마음을 열게 됐다”고 했다.
2010년부터 지역의 대안학교인 ‘사랑의 학교’, ‘다산중고’의 운영비를 지원해온 송파구는 2015년 학교밖청소년 지원 조례를 제정했다. 학교밖청소년 발굴부터 상당·교육·자립까지 통합 지원하는 청소년지원센터는 같은 해 5월 오금동에 처음 문 연 후로 지난해 6월에는 문정동으로 이전해 현재의 꿈드림센터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정씨처럼 학업을 중단하게 된 학교밖청소년에게 손을 내밀어 학교에 복귀하거나, 검정고시를 통해 사회에 진입하도록 돕는다.
송파구의 꿈드림센터는 사단법인 한빛청소년대안센터가 위탁 운영한다. 센터는 1990년대 거여마천 일대 판자촌을 찾아다니며 거리상담을 펼친 경험을 바탕으로 현재 야간 캠핑카 이동상담소인 ‘유레카’도 구의 지원을 받아 운영 중이다.
구에 따르면 송파구의 학업 중단 청소년 수는 올해 기준 총 894명으로 서울시 전체의 8.16%를 차지하고 있다. 초등학생 422명, 중학생 207명, 고등학생 265명이다. 이 청소년들을 꿈드림센터나 대안학교로 연계하고, 검정고시를 치르도록 하거나 자립을 위한 프로그램을 듣도록 하려는 노력이 이어져 왔다. 꿈드림센터 개소 이래 3년간 학업 중단 청소년 총 850명을 발굴했고, 올 9월 말 기준 318명이 센터를 통해 학교로 복귀하거나, 사회에 진입하는 등 긍정적인 성과를 보였다.
박춘희 구청장의 ‘큰 꿈’
꿈드림센터에서는 교과목별 수업은 물론, 직업체험실에서 바리스타, 제과 제빵 등 직업체험을 제공한다. 실제로 취업 후 경험을 쌓도록 연계하기도 하며, 연기·성우 프로그램, 웹툰 제작 및 3D프린트 교육 등 쉽게 접하기 어려운 프로그램도 개설·운영한다.
또 기타, 가죽공예, 뮤지컬 등 다양한 동아리 활동을 통해 센터 청소년들이 함께 어울리며 취미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박 구청장은 “송파구의 아동·청소년 사업은 어른들이 해주고 싶은 것보다 아동·청소년이 필요로 하는 것을 찾아주는 데 목적이 있다”면서 “청소년이 안전하고 건강한 사회구성원으로 자랄 수 있도록 보호하는 한편, 그들의 큰 꿈과 행복을 응원하겠다”고 밝혔다.
최훈진 기자 choigiza@seoul.co.kr
2017-12-18 11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