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동섭 서강대 교수 해설
계약은 청약과 승낙에 해당하는 두 개의 확정적 의사표시의 합치에 의해 성립한다. 그러나 현대사회의 많은 계약은 이런 의사표시의 합치에 도달하기 전에 계약교섭 단계를 거치게 되며, 중요하거나 복잡한 내용의 계약일수록 교섭 단계가 장기간에 걸치게 된다. 여기서 계약교섭의 결과 당사자 일방이 계약의 성립에 대해 정당한 신뢰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상대방이 정당한 이유 없이 계약체결을 거부함(계약교섭 부당파기)으로 인해 손해를 입는 일이 종종 발생한다.종래 국내 학설은 독일의 계약체결상 과실 이론의 영향을 받아 원시적 불능에 관한 민법 제535조를 이 문제에 유추적용함으로써, 계약교섭 부당파기자에게 일종의 (준)계약책임으로 신뢰이익 배상책임을 인정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그 뒤 ‘대판 2001.6.15. 99다40418’(광안대로 사건)에서 비로소 계약교섭 부당파기를 불법행위로 인정할 수 있는 구체적인 요건에 관한 설시가 이뤄졌다. 이 판결은 “어느 일방이 교섭단계에서 계약이 확실히 체결되리라는 정당한 기대 내지 신뢰를 부여해 상대방이 그 신뢰에 따라 행동했음에도 상당한 이유 없이 계약 체결을 거부해 손해를 입혔다면, 이는 신의성실의 원칙에 비춰 계약자유 원칙의 한계를 넘는 위법한 행위로 불법행위를 구성한다”라고 판시했다. 이로써 1)정당한 기대 내지 신뢰의 부여, 2)그 기대 내지 신뢰에 따른 상대방의 행동, 3)상당한 이유 없는 계약체결의 거부가 민법 제750조(불법행위)의 위법성 판단 요건임을 밝히고 있다.
우리 민법은 독일 민법과는 달리 제750조에서 불법행위를 포괄적, 일반적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 때문에 굳이 독일의 계약체결상 과실 법리를 차용하거나 민법 제535조를 유추적용하지 않고, 불법행위의 법리에 따라 계약교섭 부당파기를 취급하는 국내 판례의 태도는 타당하다고 생각된다.
대상 판결은 이런 종래 판례의 기본 입장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계약교섭 부당파기가 불법행위에 해당할 경우 손해배상의 구체적인 범위까지 판단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우선 원·피고 사이에서 아직 구체적, 확정적인 의사표시의 합치가 없었기 때문에 계약은 성립하지 않았다고 판단해 계약성립을 전제로 한 원고의 이행이익(원고가 받게 될 보수, 이 사건의 경우 창작비에 해당하는 금액)의 배상 청구를 기각했다.
이어 ‘대판 2001.6.15. 99다40418’이 설시한 위법성 판단의 구체적인 요건에 비춰 피고의 계약교섭 파기행위는 불법행위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이 경우 손해배상은 계약체결을 신뢰한 상대방이 계약이 유효하게 체결된다고 믿었던 것에 의해 입었던 손해, 즉 ‘신뢰손해’에 한정된다고 봤다. 신뢰손해는 예컨대 그 계약의 성립을 기대하고 지출한 계약준비 비용처럼, 그런 신뢰가 없었더라면 통상 지출하지 않았을 비용 상당의 손해다. 대상판결은 아직 계약체결에 확고한 신뢰가 부여되기 전 상태에서 계약교섭의 당사자가 계약체결이 좌절돼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고 지출한 비용은 여기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판시하면서, 원고가 피고의 공모에 응해 시안작성을 위해 지출한 비용 관련 청구도 기각하고 오직 피고가 입은 정신적 고통에 대한 손해배상(위자료)만을 인정했다.
요컨대 대상판결은 계약교섭 부당파기가 불법행위에 해당하는 경우 손해배상은 ‘신뢰이익의 배상’에 한정되며, 계약체결에 관한 신뢰가 형성되기 전에 지출한 비용, 특히 이른바 ‘투기적 비용’은 배상범위에서 제외된다는 점을 밝혔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 뒤 ‘대판 2004.5.28. 2002다32301’(국방연구소 사건)은 계약교섭의 부당파기가 불법행위를 구성하는 경우, 계약교섭 단계에서는 아직 계약이 성립된 것이 아니므로 설령 이행에 착수했더라도 이는 자기의 위험 판단과 책임에 의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고 봤다. 하지만 만일 이행의 착수가 상대방의 적극적인 요구에 따른 것이고 이와 같은 이행에 들인 비용의 지급에 관해 이미 계약교섭이 진행되고 있었다는 등의 특별한 사정이 있을 때에는 당사자 중 일방이 계약 성립을 기대하고 이행을 위해 지출한 비용 상당의 손해도 배상범위에 포함된다고 판시했다. 물론 이행과 관련해 지출한 비용이 손해배상의 범위에 포함되는 것은 이 판결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매우 이례적인 경우에만 인정된다고 할 수 있다.
이 글에서 적은 것처럼 현대사회의 많은 계약은 복잡하고도 장기간에 걸친 교섭단계를 거치게 되며, 이에 따라 계약교섭 부당파기 사례도 계속 증가하리라 예상된다. 따라서 이 분야 판례의 집적과 아울러 향후 다양한 부당파기 유형에 따른 보다 심도 있는 학문적 연구가 요청된다.
■ 엄동섭 교수는
▲1955년 대구 ▲서울대 법학과 ▲서울대 대학원 법학박사 ▲미국 코넬대 로스쿨 방문교수 ▲법무부 민법개정위원회 불법행위분과 위원장 ▲서강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민사법학회 차기(2015년) 회장 선출
2014-05-12 28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