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높이 날아 오르는 이 그네뛰기, 여성 스포츠 치고는 최고의 스포츠잖아요. 그 예전엔 우리나라 여성들, 말 타기도 즐겼고 그네뛰기도 즐겼다고 합니다.
그런데 특히 여성들에게 차별과 편견의 굴레를 씌워놓고 있던 그 예전엔 이 단오 무렵의 그네뛰기는 일상생활의 모든 억압에서 활짝 벗어날 수 있는 기회였던 겁니다. 그 그네가 하늘 높이 높이 날아오르는 것처럼 몸도 마음도 해방감을 만끽할 수 있었거든요.
그리고 그네 탈 때의 멋은 펄럭 펄럭 펄럭, 그 치맛자락이 펄럭이는 것도 하나의 멋이지만요. 처녀들의 머리를 묶은 그 빨간 댕기 있잖아요. 허공에 한 번 높이높이 치솟았다가 내려올 때, 그 빨간 댕기머리가 출렁 출렁하면서 나부끼는 모습. 또 그네 타는 처녀들의 치마 속으로 바람이 가득하게 들어가 치마 폭이 고무풍선처럼 잔뜩 부풀어 오르잖아요.
총각들은 처녀들의 그 그네 타는 모습을 바라보고 나면 십중팔구는 그날 밤부터 끙끙 앓기 시작하는 상사병이 날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그리고 우리 서울의 경우 이 단오 무렵에, 그래요 전에는 창경궁 같은 곳에서 이 그네뛰기 대회가 열리곤 했어요. 그리고 장충단공원에서도 이 그네뛰기가 해마다 열렸구요. 특히 6·25이후에 장충단 공원에서 단오 무렵에 벌어진 그네뛰기 대회에선 평양이나 개성이 고향인 실향민들이 대회를 거의 휩쓸 정도로 그네들을 그렇게 잘 탔던 겁니다. 그네를 타고 높이높이 반공중으로 날아올라 기둥에다 매달아 놓은 방울을 발로 힘껏 걷어차는 높이뛰기 대회. 그 쇠방울에서 짤랑짤랑 소리가 여러 번 들릴수록 그네뛰기 성적은 더 올라가는 거죠.
그리고 광복이후 한 때는 남산에서도 그네뛰기가 활발했었고요. 종로 쪽에선 전에 운현궁 별장(대원군 별장)에서 그네를 매고 대회를 열기도 했습니다. 평상시엔 개방하지 않았던 운현궁 별장이었지만 뜰에 큰 나무들이 많아서 단오 무렵에 그네뛰기 하기엔 더없이 좋았었기에 이 단오무렵 만큼은 종로 구민들에게 운현궁별장이 개방되곤 했던 거죠. 또 동대문 쪽에선 4월 초파일부터 그네를 뛰기 시작해 5월 단오까지 계속 했었는데요. 특히 ‘관운장’의 화상을 모신 동묘의 그네뛰기 대회는 서울에서도 규모가 크기로 아주 유명 했습니다. 그런가하면 이화여대 뒷산에서도 그네를 많이 뛰곤 했죠.
그런데 약 70년 전인 1937년. 그 ‘중일전쟁’ 이후 광복을 맞을 때 까지 우리 민속놀이의 말살정책에 따라 일본인들이 그네뛰기조차 못하게 했던, 그런 시절도 있었다는걸 아시는지요. 우리에겐 그네뛰기조차 내 마음대로 할 수 없었던 그런 시절도 있었던 겁니다. 그러다가 광복된 다음해 단오절에 전국적으로 다시 그네뛰기가 부활이 됐던 거죠.
그리고 규모가 제법 큰 그네뛰기 대회에선 쌀 몇 가마씩을 내걸기도 했고, 또 돼지 한 마리, 광목 한통, 양은 냄비, 검정고무신 이런 것들을 상품으로 내건 경우도 많았어요.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에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밀 때는 선녀가 달나라로 가는 듯, 돌아올 땐 선녀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듯’
또 신윤복의 그림에도 보면, 노랑 저고리에 빨간 치마의 여인네가 막 그네 줄에 오르는 모습이 그려져 있잖아요.
그리고 춘향이와 이도령의 사랑을 엮어주게 된 계기, 그것도 바로 단오 무렵의 그네뛰기가 있었기 때문에 몇 백년 세월이 흐르도록 일편단심 변치 않는 그런 사랑이야기가 태어날 수 있었던 거겠죠. 춘향이와 이도령 같은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를 다시 만들어 내기 위해서라도, 단오를 전후해 처녀총각 젊은이들 사이에 그네뛰기가 또다시 성행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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