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 지하철 사고 CCTV 영상 실시간 전송…

공사 관계자들 “한밤 파쇄석 500t 운반” 스카이칠십이 “금시초문, 말도 안 된다” 인천공항공사 “사실 확인 땐 법적 조치”

용산전자상가 일대 ‘AI·ICT 거점’ 된다

평균 27.9년… 부처별 최대 13년 11개월차 행복도시건설청 17년 4개월로 가장 빨라 세종시 평균 17.6년… 전남은 28.3년 걸려

성동 AI·미래기술체험센터, APEC 문화고위급대

통계청 발표 ‘2020 고령자 통계’ 분석

마을버스 닿지 않는 곳, ‘내편중구버스’ 누벼요

통계청 발표 ‘2020 고령자 통계’ 분석

[인천이 원조] (13) 기상대

기사 읽어주기
다시듣기
폰트 확대 폰트 축소 프린트하기
현대 생활에서 날씨는 사람들의 일상에 밀접하면서도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정보 가운데 하나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최초의 기상대는 언제 어디에 설치됐을까?


초기 통감부관측소 건물. 1904년 응봉산 정상에 목조 2층 69평 규모의 인천측후소가 설치됐다.
인천시 역사자료관 제공


공식적인 최초의 기상대는 1904년 4월 인천시 중구 전동 25, 응봉산 정상에 세워진 ‘인천관측소’다. 제물포고등학교 교정 뒤편 울창한 숲속에 우뚝 솟은 백색의 원통형 건물이었다. 러일전쟁을 앞둔 일본이 해군작전에 필요한 기상관측을 위해 설치했다고 한다.

‘한국사연표’에는 1884년 7월 부산 일본전신국에서 기상관측을 시작했다고 표기돼 있지만 근대적이고 체계적인 관측을 시작한 것은 인천관측소라는 것이 정설이다. 또 일본이 1900년 인천 중구청 뒤 송학동에 있던 옛 수진여관 자리에 기상사무소를 개설했다는 얘기도 있지만 정확한 기록이 없어 이것이 정식 기상대였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산 정상에 2층 목조 건물로 69평 규모로 세워진 인천관측소는 국내는 물론 세계 각지의 기상정보를 수신해 그날 그날의 날씨를 분석하고 예고하는 중앙기상대 역할을 했다.


1910년 합병이후 흰색의 원통형 건물로 신축된 총독부관측소 모습.


초대 인천관측소장에는 일본 중앙기상대 기사였던 와다(和田)씨가 부임해 기틀을 잡았다. 당시 인천관측소는 경성, 대구, 부산, 목포, 강릉, 평양, 용암포, 원산, 성진, 중강진, 웅기 등 13개 지역의 측후소는 물론 중국 만주, 대련, 천진, 청도, 제남 측후소까지 통괄했다. 또 일본 중앙기상대, 영국 런던의 그리니치천문대와도 기상정보를 주고받았다. 인천관측소 및 지방 측후소에서는 매일 오전 2시,6시,10시, 정오, 오후 2시,6시,10시 등 모두 7회에 걸쳐 기상을 관측했다. 날씨에 이상이 있을 때에는 매 시간 또는 30분마다 임시 관측을 했다. 관측사항은 기압, 기온, 습도, 풍향, 풍속, 강수량, 증발량, 구름의 투명도 등 중요한 기상요소를 비롯해 그외의 기상현상을 실측했다.1910년 4월에는 인천관측소에서 헬리 혜성을 관측하기도 했다.

일반인을 상대로 한 관측소의 주요업무는 매일 정오를 알리는 시보와 오후 3시 천기 예보였다. 일기예보는 “서해로 구름이 창궐하고 태풍이 불 조짐이 보이나니….”라는 식의 고풍스러운 멘트였다. 특히 정오 시보는 포를 쏘아 알렸는데 포수가 손을 다치는 일까지 발생했다. 실제로 손가락 8개를 잃은 포수는 얼마 전까지 동구 화평동에서 ‘전당포 조막손 아저씨’로 불리며 생존했다.1924년 5월21일에는 15분이 지나도록 오포가 울리지 않아 사람들의 비난을 샀다. 당시 인천 사람들은 관측소가 있는 응봉산을 오포 쏘는 곳이라 해서 ‘오포산’으로 불렀다.

인천관측소는 한일합병 후 조선총독부 산하기구가 되었는데,1912년 3월 총독부관측소로 확대 개편되면서 지금의 중앙기상대와 같은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 관측소는 기상에 관한 것 외에도 우리나라 주변 해역, 동북해, 태평양, 일본 주변 해역에 이르는 광범위한 해역에 대한 해양관측을 실시했다.

인천관측소는 1939년 7월 중앙기상대로 명칭이 바뀌었다. 광복 후 1948년에는 중앙기상대가 인천에서 서울로 이전되고,6·25전쟁으로 중요한 기상관측 시설이 파괴돼 업무를 수행하기가 어려워지자 1953년 중앙기상대의 업무마저 서울로 이전된다.

그 후 인천은 지역 측후소로 기능이 축소됐다가 1992년 인천기상대로 명칭이 바뀐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인천 김학준기자 kimhj@seoul.co.kr
Copyright ⓒ 서울신문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페이스북 트위터 밴드 블로그

Leaders Today

오세훈 “年 270만명 찾는 월클 K팝 공연장 될

창동역 서울아레나 공사장 점검 국내 최대 3만 5000명 수용 규모 공적률 34%… 2027년 3월 준공

노원 수제맥주축제 12만명이 “캬~”

200종 즐겨… 세계 테마존 큰 인기 화랑대 철도공원서 ‘여름밤 낭만’

자료 제공 : 정책브리핑 korea.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