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0년 옛 ‘약수동 달동네’가 재개발되면서 남산과 매봉산을 끼고도는 버티고개 자락에 5150가구의 대단지가 들어섰다.이 아파트를 사이버 아파트로 만든 ‘남산타운21닷컴(namsantown21.com)’도 이 때 자생했다.
전국 유일의 ‘사이버 아파트’를 만든 공수… 전국 유일의 ‘사이버 아파트’를 만든 공수진(앉은 사람)씨가 이웃 아파트 주민들과 남산타운아파트의 홈페이지를 보면서 얘기를 나누고 있다.왼쪽부터 황미순,정유리,김지영,정현주씨. 정연호기자 tpgod@seoul.co.kr |
처음에는 게시판 하나로 시작한 홈페이지가 하루 평균 300여명이 다녀가고,대부분의 아파트 주민이 이용하는 알짜 사이트로 성장했다.‘남산타운21닷컴’을 이용하기 위해 컴퓨터를 배운 할아버지,할머니 주민어르신도 계신다.
●아파트사람들의 소통수단
공씨는 “아파트에서 어느 한쪽의 세력이 독주하는 것을 감시하고,주민의 편의를 꾀하는 매개체를 만들고자 했다.”고 홈페이지를 만들게 된 계기를 설명했다.집에서 살림만 하기보다 무엇인가를 하는 엄마의 모습을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마음도 작용했다고 한다.
공씨가 처음 홈페이지를 만들 무렵 아파트 홈페이지 만들기가 유행했었다.건설회사에서 앞다퉈 아파트 홈페이지를 광고했고,거대 통신사에서 전국의 모든 아파트에 홈페이지를 만들어 주기도 했다.하지만 ‘남산타운21닷컴’처럼 자생적으로 설립·운영되는 곳은 그때나 지금이나 없다.
공씨의 친한 이웃이자 같은 아파트 주민인 정유리씨는 “건설회사나 통신회사에서 만든 홈페이지는 너무 상업적이라 실패했다.”면서 “아파트 주민들이 원한 것은 자유롭게 하고 싶은 이야기를 맘껏 할 수 있는 홈페이지”라고 말했다.
‘남산타운21닷컴’은 아파트 관리사무소나 부녀회가 상권이나 관리업체 선정 등의 이권을 놓고 뇌물을 받거나 헛 짓을 하지 못하도록 감시하는 ‘동네의 작은 언론’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덕택에 관리사무소는 관리비 내역을 투명하게 공개하여 꼬박꼬박 홈페이지 게시판에 올린다.
홈페이지 개설 초기 공씨는 게시판에 오른 내용때문에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주민들끼리 경찰에 진정을 하는 일도 많았다.“보아하니 돈도 안 생기는데 왜 골치아프게 홈페이지를 운영하느냐,당장 폐쇄하시라.”는 내용의 전화를 경찰서에서 받았을 때는 무섭기도 했다고 한다.
“인터넷에 오른 글은 내 텃밭에 심은 야채와도 같잖아요.처음에는 힘들었지만 이제는 형사와 싸우기도 하고,말도 안 되는 글이 오르면 즉시 삭제하면서 인터넷상에서 주민들끼리 다투는 일은 거의 없답니다.”
지금 ‘남산타운21닷컴’은 거의 운영자가 없는 홈페이지와 다름없다.주민들끼리 ‘아나바다’ 게시판을 통해 중고품을 활용하고,‘신문고’에서는 주차문제의 불편함을 토로하기도 하는 등 스스로 알아서 굴러간다.
●최대 현안은 초등학교 건립
남산타운 아파트 주민들의 숙원은 단지 근처에 아이들이 마음 놓고 다닐 수 있는 초등학교가 생기는 것이다.
주민 김지영씨는 “5000가구가 넘는 대단위 아파트 단지를 지으면서 상가는 6곳이나 분양하고 학교를 마련하지 않은 것을 이해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아파트에서 가장 가까운 학교도 위험한 교차로와 고가도로를 가로질러 30분 가까이 걸어가야만 한다.
하지만 중구에 학교를 지을만한 마땅한 땅이 없는 것이 문제다.국회의원,구의원 등 후보자들이 선거때마다 학교를 짓겠다고 공약하지만 아직까지 제대로 사업이 진행되지 않고 있다.아파트 주민인 박성범 국회의원은 지난달 초 “학교건립을 위해 노력중이니 조금만 기다려 달라.”는 글을 게시판에 올렸다.
●시골마을같은 가족적인 분위기
강남의 일부 비싼 아파트에서는 부녀회를 중심으로 집값을 담합하는 ‘아파트 이기주의’가 서민들의 마음을 울적하게 한다.
혹 남산타운 홈페이지도 이기주의의 발로로 이용되지 않느냐는 질문도 많이 받았다고 한다.정유리씨는 “남산타운 주민들은 집값보다는 아이들이 편하게 학교다니고 삶의 질을 높이는 문제에 더 관심이 많다.”고 잘라말했다.
반상회에 직접 참석하기 힘든 남편들이 직장에서 홈페이지를 들락거리면서 아파트에서 어떤 일이 있는지 훤하게 알게 되는 점도 좋다.덕분에 홈페이지를 중심으로 주민들간의 왕래가 잦아 아파트 분위기가 시골마을 같다고 이웃들은 자랑했다.아파트 동간의 간격이 넓고 나무가 많은 점도 남산타운의 자랑이다.성현아,정준호,신정환 같은 연예인들도 남산과 한강 조망권을 갖춘 남산타운 아파트를 사랑하는 주민들이다.
●홈페이지는 아파트 주민들의 텃밭
공씨는 “구의원이라도 나오려고 홈페이지를 운영하냐고 주위에서 의혹의 시선을 보내기도 하지만 전혀 그럴 생각이 없다.”고 밝혔다.이웃 정씨는 “개인의 시간과 돈을 투자하는 공씨의 희생이 없었다면 5년 가까이 홈페이지가 유지되지 못했을 것”이라고 거들었다.‘남산타운21닷컴’은 앞으로도 이 아파트 주민들이 자유롭게 목소리를 내는 ‘행복한 텃밭’으로 뿌리를 깊게 내릴 것이다.
윤창수기자 ge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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